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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works

biography

description
Kim Do hoon solo exhibition
2014-11-07 ~ 2014-12-06
Kim Do hoon
 

조각난 거울로 다시 짜여 진 동물들

 

이선영(미술평론가)

 

김도훈은 종이처럼 가느다란 스테인레스 띠를 수없이 엇겨서, 얽히고섥힌 표면을 만들어 낸다. 그러한 표면들로 정교한 동물상과 자화상은 엄청난 노동 강도를 통해 형성된 밀집된 형태로, 그것이 속한 주변 환경을 산산이 조각낸다. 상을 바라보는 관객도, 상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풍경도 여러 겹의 층을 가지는 그 금속 피부 위에서는 잘게 찢어지고 만다. 지상에 든든하게 서 있는 기념비적 조각상과 달리, 그것들은 마치 깨진 거울조각들이 모여 만들어진 듯 취약해 보인다. 깨진 거울의 이미지는 주변을 반사하는 입체 거울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 반사는 온전한 통합 상이 아니라 해체를 야기한다. 상들은 반사면을 통해 자신의 물질성을 감추고, 주변을 시뮬레이션하면서 환경 속으로 숨어든다. 자기 동일성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뽐내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 스며든다는 것은 삶보다는 죽음에 근접하는 것이다. 한 개체의 완전한 죽음은 주변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다. 중층의 금속 표면에는 타자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반사상으로 얼룩덜룩해 보이는 금속 피부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은 증상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속 동물은 타자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면역학적 담론을 통해 현대의 화두와 연결된다. 다나 해러웨이는 [자연의 재 발명]에서, 면역체계는 정상과 병리의 영역에서 무엇이 자아와 타자로 간주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경계를 구축하고 유지한다고 지적한다. 저자에 의하면 질병은 자아의 경계들에 대한 오인이나 위반의 과정을 말한다. 무엇이 단위로, 즉 하나로 간주되느냐하는 것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며, 확고한 대상 보다는 경계를 만드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러한 경계는 몸과 의미들을 생산한다. 해러웨이가 언급하는 면역학에 의하면, 면역체계가 본적이 없으며 내적으로 반영한 것이 없는 어떤 외부적 침입자도 없다. 자아와 타자는 대립적 성질을 잃는다. 우리는 면역체계가 막는 위협적인 비자아들에 의해서만 침범당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자신의 낯선 부분들에 의해 침범된다. 이질성은 밖이 아니라, 이미 항상 동일성 자체 내에 있다. 작가가 고안한, 일련의 단위로 재구성된 텍스트화 된 몸은 이러한 경계의 문제를 제기한다. 여기에서 몸은 기호체계, 즉 복잡한 의미 생산의 장이 된다.

김도훈의 인간을 포함한 동물상들은 일정한 크기의 금속판으로 구성된 고도의 인공성이 두드러지지만, 구조적인 면에서는 군복을 입은 군인처럼 늘 상 한계조건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종들에 보편적인 의태(擬態)의 생태학이 있다. 실내에서 조명을 받으면 조각상들은 주변 공간으로 확장되는 시각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효과는 개체가 생성, 또는 소멸하는 단계의 원소적 차원을 가시화한다. 개체는 원소로 해체되어 자신이 비롯되었던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가 만든 것은 사슴, 도마뱀, 북극곰같이 멸종 위기의 생물로서, 생멸의 경계 위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종들이다. 멸종 위기 종에 자화상 또한 끼워 넣은 것은 불안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작가로서의 자의식 또한 반영된 것이다. 자화상은 순한 초식동물이나 녹아내려 비좁아진 얼음 조각 위에서 웅크리고 있는 곰에 비해 구체적인 표정이 읽혀진다. 자화상은 쇠 수세미를 이용해 머리카락을 연출하여,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는 인간만의 독자적 특징을 과장되게 표현했으며, 정면을 주시할 수 있는 인간 특유의 공격적 시선 또한 빼놓지 않았다.

또 다른 자화상은 빈 동공에 안면만 표현하여 가면 같은 모습이다. 그의 자화상은 성이나 인종 등을 넘어서 보다 원초적인 인간의 특징이 강조되고 있으며, 동시에 껍데기들로만 층층이 싸여있는 본질 부재의 인간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은 휴머니즘에 바탕 하는 친근한 인간상을 낯설게 만든다. 이번 전시의 동물 뿐 아니라, 이전에 만든 작품 [fruit]처럼 정방형 입방체나 둥근 메론 같은 기하학적이고 식물적 형태 역시, 중심과 주변의 관계성 대신에 표층의 결합체를 강조한다. 그는 모델이 된 대상을 정교하게 모사하지만, 흙 작업에 기초한 섬세한 형태에 비한다면, 차이가 있다. 금속 띠의 용접은 선에서 면으로, 그리고 형을 향하는데, 형태는 흙덩어리를 한 점 한 점 붙이듯 만들어진다. 기본 재료는 종이처럼 얇은 스텐레스 판을 1cm 정도 너비의 띠로 만든 것이다. 스텐레스 띠는 띠로 잘라낼 수 있는 가장 가는 너비인 5mm부터 시작하여 1mm 간격으로 커지며, 섬세한 부조의 경우 좀 더 가는 띠로, 입체의 경우 큰 띠로 제작한다. 5-6cm 길이의 띠는 모듈이 되어 생명을 재창조하는데 쓰인다. 3-4가지 너비의 선으로 5겹 정도 엇겨서 용접한 금속 띠는 보통 스텐레스 보다 광을 한 번 더 낸 수퍼미러 라서, 작품 표면은 매우 반짝거린다.

흙과 석고를 이용하여 형태를 만드는 기본적인 조각의 과정 외에, 금속 골조를 만들고 빈 공간을 금속판들로 덮고, 띠들을 끼고 용접하는 여러 단계의 공정은 마치 털을 하나하나 심는 듯 노동집약적이다. 이러한 작업은 솜씨 좋게 잘 만들어진 대상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곧 사라지려 하는 것들--인간과 동물--을 정교하게 재창조하는 행위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러한 인간의 노동행위는 이중적이다. 도구를 이용한 노동은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특징이 되었으며, 동시에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였고 동물을 도구화시키며, 그럼으로써 결국에는 인간자체도 위협받는 역설의 매개 고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김도훈의 작업에서 멸종 위기 종의 동물과 인간을 같은 맥락에서 본 것은 동물을 타자화 시키는 관습으로부터 탈피하는 방식이다. 인간 속에 있는 동물성, 동물 속에 있는 인간성을 보다 의식화할 때, 인간의 자연에 대한 폭력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시에서 동물과 인간이 구별되는 점은 동물은 완전한 형상을 갖추고 있고,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에 있을 뿐이다.

자연 속에서 동물은 완전한 형태로 태어나지만, 인간은 조산아로서 불완전하게 태어나며, 이미 구축되어 있는 문화의 도움이 아니면 생존할 수 없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인간적 세계 속에서, 점차 인간으로 만들어진다. 머리 긴 자화상에 유일하게 박혀 있는 눈은 지상에 매여 있는 동물의 그것과 달리, ‘천상의 높은 것들을 볼 수 있도록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눈은 온 몸의 창이자 영혼의 거울’(P. 보에스튀오)이다. 아르멜 르 브라 쇼파르는 [철학자들의 동물원]에서 얼굴이라는 말에는 시각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이 있다고 지적한다. 인간이란 우선적으로 짐승보다 적절한 시선을 가지는 것이다. 쇼파르는 시선이 인간에게만 속해 있는 정복 기능, 모든 것을 가늠하는 기능을 갖고 있고, 그 관점은 모든 사물과 존재의 양상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결정짓는다는 플라톤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의 시선과 이성을 통해 그 나약함을 인간 고유의 우월한 힘으로 전도시키고, 심지어 인간의 탁월함에 대한 근원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자아를 소유하려는 인간의 속성은 비인간을 자기 것으로 삼으며 연장한다. 인간중심주의는 제한된 소수의 이익으로 축소된다.

호르크하이머는 [도구적 이성비판]에서 자연을 지배하려고 노력해온 인간의 역사는 또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해온 역사라고 본다. 자아 개념의 발전은 이러한 이중적인 역사를 반영한다. 이성은 자연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자연에 대립한다. 인간 이외의 것들을 타자화, 도구화 하는 이러한 인간중심의 목적론이 지구상의 수많은 종들을 사라지게 한 근본적인 원인이다. 인간과 동물이 동질이상의 관계에 있는 김도훈의 작품은 단순히 동일한 입자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론적 차원들을 짜 맞추는데 강조점이 있다. 그들은 한 올 한 올 생명의 그물망으로 짜여 있고 서로 연결된다. 인간 또한 생명이라는 그물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한 가닥의 씨줄이나 날줄에 불과’(프리초프 카프라)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생태주의는 낭만주의, 또는 뉴 에이지 같은 신낭만주의에 전형적인 전일론적(holistic) 사고와는 거리가 있다. 그것들은 통합 상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겹겹이 싸고 정교하게 용접해도 불연속적인 틈을 매울 수 없다.

그물망적(Web-based) 시각이 내포된 김도훈의 작품에서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방식은 무작위(random) 적이다. 그것은 결코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 A.L. 바라바시가 [링크]에서 말하듯이, 운과 무작위성이 네트워크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자연이 따를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해결책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작위 네트워크 모델은 철저하게 평등주의적이다. 바라바시는 자연이 맹목적으로 링크를 여기저기 던지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보면 어떤 노드도 특별대우를 받거나 배제되지 않는다고 본다. 사회, 세포,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경제 이 모든 것들은 무작위성과 복잡성을 연결시킨다. 실재하는 것은 우연과 무작위의 성질이 조합되어 있는 네트워크이다. 네트워크는 새로운 노드(node)와 링크(link)의 추가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적인 시스템이라는 현실이다. 엄청난 육체적 노동을 요구하는 매우 아나로그한 김도훈의 조각은 이러한 네트워크의 동역학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작업은 네트워크의 링크를 따라 전개되는 동역학, 이 노드에서 저 노드로 이 링크에서 저 링크로 옮겨 다니면서 부서진 유리조각을 맞추는 노력’(바라바시)이 있다. 그는 자연이라는 모델을 정교히 모사하지만, 모사의 거울은 분자적 차원에서 조각나 있고, 재구성된다. 거울이라는 가상의 통합 상이 전제하는 인간의 상상, 그리고 그것에 끼어드는 재현의 이데올로기는 타자를 복속시키는 동일자의 폭력을 낳았다. 그러나 김도훈은 결국 인간에게도 되돌아오는 폭력을 낳는 가상을 깨는 것에 머물지 않고, 깨진 조각들을 애써 그러모은다. 조각난 것들의 봉합은 덜그덕 거리면서 거울 저편으로부터 기어 나올 듯하다. 이 거울 동물들은 동일자의 논리를 무한히 확대 재생산하는 인간 앞의 거울과 평행하게 존재하는 또 다른 차원을 제시한다. 그것은 거울이 지배하는 재현의 세계를 여러 우주 중의 하나로 상대화시킬 것이다. 김도훈의 작업은 포스트모던 문화에 만연한 이질적인 것의 꼴라주를 넘어서, 구조화된 또는 구조화하는 차이의 장으로 재 조직화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맹목적인 이성의 소멸이 아니라, 그것의 상대화를 강조한다.